우리가 전 세계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가장 훌륭한 교육 제도를 갖출 때까지 저는 결코 만족하지 않겠습니다.
There's no greater return than education to the society second to none.
전 세계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회에 교육이 가져다주는 수확보다 더 커다란 수확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난 1960년 9월 26일 저녁 시카고에서 열렸던 역사적인 케네디-닉슨 TV 논쟁(Debate)의 초엽과 말엽에서 쟌 에후 케네디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교육의 중요성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이다.
그 당시만 해도 구소련에서 해마다 배출되던 과학자(Scientist)와 공학자(Engineer)의 숫자가 미국의 약 두 배나 되었다. 구소련의 쿠르시초프에 의하여 시작되었던 동서 냉전(Cold War)의 관계에 막 돌입했던 미국은 과학이나 우주 분야에서 일종의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영리한 쟌 에후 케네디는 그러한 취약점에 대한 실용적인 해결책으로 교육 분야의 집중 발전안을 제안했다. 그의 대통령 당선 후 시작된 미국 교육 제도의 획기적인 개혁은 사실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곳 씰리콘 밸리에서는 섬세한 손재주를 한, 중, 일처럼 평소에 소싯적부터 젓가락으로 연마할 기회가 거의 없다. 대신에, 유치원(Kindergarten) 전의 보육원(Preschool) 시절부터 고교(High School) 졸업 때까지 줄기차게 항상 뭔가를 두뇌로 생각하고 스스로 고안하여 가위나 톱으로 자르고 망치로 뚝딱거리며 만들어서는 정해진 시간 내에 제출해야 하는 창조적인 숙제(Creative Homework)를 꽤나 지겹도록 많이 내준다. 단적으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서 내라는 얘기니, 그 통에 자녀 교육에 관심 많은 대부분의 부모들도 곁에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다.
여기 학교 교육의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웬만해서는 절대로 암기(Memorization)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초등학교(Elementary School)에서는 하다못해 구구단도 굳이 외우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편리한 계산기가 다 있는데 왜 그걸 반드시 외워야만 하느냐는 논리다.
실제로, 여기서는 SAT(Scholastic Aptitude Test) 즉 대학 수학 능력 측정을 위한 영어(English)와 작문(Writing)과 미적분(Calculus)도 아닌 대수(Math 또는 Algebra) 시험 중, 대수 시간에는 계산기 사용이 오히려 거의 의무 사항이다. 암산으로도 다 되는데 말이다.
가끔 학교에서 교과서(Textbook)나 필기한 공책들을 펼쳐 놓고 시험을 보라는 것은 예사다. 시험이 끝난 후 금방 잊어버리면 그만인 각종 문제의 해답에 대한 단순한 기억 훈련보다는 인생살이에 있어서 장기적으로 더욱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포괄적인 문제 해결(Problem-Solving) 능력 훈련에 중점을 둔다는 실용적인 교육 철학이다. 기억은 순간적이지만 해결 능력은 영구적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넉넉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니, 심심하면 전 세계의 각종 분쟁 해결사 노릇을 즐겨 자청하는 일반 미국인들의 보편적인 태도도 과연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이틀이나 되는 주말이나 길고도 긴 방학(Vacation)에는 각급 학교 선생들이 모두 한꺼번에 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학생들에게 숙제를 거의 내주지 않고 일부러 뺑뺑 놀게 만든다. 그렇지만 평일에는 집에서 해가야 할 각종 숙제가 산더미와도 같다. 공부할 때는 아주 팍 하고 놀 때는 아주 팍 놀라는 얘기다. 그러면 공부는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오직 일부일 뿐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스스로 체험할 수 있는 시간적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저절로 자연스럽게 전인 교육이 되는 셈이다. 실용주의에 바탕을 둔 합리적인 교육 방법이다.
우선 이곳의 각급 학교 교과서는 거의 모두 완벽하다. 오자나 탈자가 전무한 것은 기본이다. 내용도 극도로 상세하고 구성도 철두철미하다. 책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각종 보충 설명도 너무너무 자세하여 애매모호한 점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어떤 과목이든지 간에 영어 사전을 제외한 어떤 종류의 다른 참고서도 아예 필요가 없다. 아니, 그러한 참고서라는 개념조차도 전혀 없다. 모든 홀수 문제의 정확한 해답과 자세한 풀이 과정은 책 뒤에 이미 붙어 있고, 짝수 문제의 그것은 선생들에게만 부록으로 배포가 되나, 홀수 문제를 풀 수 있으면 그에 상응되는 짝수 문제는 누구라도 혼자서 무난히 풀 수가 있으므로, 다른 학습지가 아예 필요 없다. 아니, 그러한 별도 학습지라는 개념조차도 거의 없다. 논리의 비약이 없는 튼실한 교과서 하나면 되는 것이다.
언뜻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곳의 일반적인 학교 환경과 교육의 기본 자재인 교과서가 이렇듯 이미 거의 완벽하기 때문에, 별도의 과외 공부라는 것은 아예 거의 상상도 못한다. 필요한 기본 지식의 전달은 오후 2시쯤이면 대개 다 끝나는 학교 공부만으로 충분하다.
아니, 학교 교과서에 실린 내용에 대한 자습만으로도 충분하다. 누구든지 집에서 혼자 독학을 하더라도 마음만 집중하면 무난하고 완벽한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그 무엇도 불필요하다.
그래서 그런지, 자녀들을 아예 아무런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부모가 직접 가정에서 가르치는 자택 학습(Home-Schooling)이라는 묘한 교육 제도의 선택이 점차 증가되는 추세다. 그러나 실질적인 인간관계 형성 훈련의 기회가 줄기 때문에 그렇게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여기 학생들은 방과 후에 여유로운 시간이 아주 많은 편이다. 그리하여 다양한 개인적인 활동을 한다. 주로 학교 안팎에 천지로 널려 있으며 거의 무료로 제공되는 각종 취미 생활을 즐긴다. 축구(Soccer), 미식축구(Football), 야구, 농구, 배구, 정구, 레슬링, 육상, 수영 등 각종 운동은 물론, 치어리딩(Cheerleading), 악대, 연극, 방송, 미술, 논쟁 등등 머리 싸매고 공부하는 것만을 빼고는 거의 모든 것을 다 한다.
아니면, 학교 근처의 각종 직장에서 다양한 일을 하며 손수 용돈을 좀 벌거나 교내외의 각종 자원 봉사를 통하여 남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면서 실전 인생에 부딪혀 보기도 한다. 거의 모두가 스스로 굉장히 바쁘게들 움직인다.
그러나 일정한 특수 시험을 거쳐서 선발된 영재 아동(Gifted Child)들은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주로 방과 후에 체계적으로 별도의 무료 과외 공부를 시킨다. 학생 개개인의 능력에 맞춰서 특수 시간표를 작성하고 그에 따른 맞춤 영재 교육을 주도면밀하게 진행한다.
관심 있는 선생들의 엄청난 자발적인 헌신이다. 그리고 중학교(Middle School)부터는 개인별 진척 상황을 하나하나 면밀히 지켜보고 자세하게 분석한 후, 웬만한 과목들은 대개 아예 훨씬 수준이 높은 대학교 교과서로 공부를 시켜버린다.
물론, 과목별로 얼마든지 월반도 가능하다. 때로는 부근의 대학교로 가서 실력에 걸맞는 강의를 듣게 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웬만한 대학 강의실에는 가끔씩 조그만 땅꼬마가 눈에 띄기도 한다. 진정한 배움의 길에 나이 제한은 없다.
원래, 촌지란 마음에서 우러나온 작은 선물이란 뜻이다. 그런데 그것은 시기와 장소와 내용물에 따라서 느닷없이 뇌물로 돌변하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볼 때, 사후에 공개적으로 작은 물건으로 주면 상쾌한 선물이지만, 사전에 은밀하게 현찰 봉투로 주면 거의 틀림없이 더러운 뇌물인 것이다.
순수한 선물과는 달리, 비굴한 뇌물에는 항상 모종의 대가성이 따라붙는다. 선물은 일방향이지만 뇌물은 쌍방향이다. 그리하여 늘 선물은 아름답지만, 뇌물은 찜찜한 것이다.
이곳 실리콘 밸리에도 선생에게 주는 촌지는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물이지 결코 뇌물은 아니다. 자기 자식만을 조금이라도 더 잘 봐달라고 학기 초엽에 미리 선생에게 금전 봉투를 갖다 바치는 그런 한없이 몰지각하고 몰염치한 학부모는 아예 없다. 이곳에서 그런 얘기는 전혀 들어본 적도 없다.
한동안 잘 가르쳐준 선생에 대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표시로 비싸지는 않지만 사랑과 정성이 듬뿍 담긴 간단한 선물을 마지막 수업 시간이 다 끝날 무렵에 다들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학생이 선생에게 주는 일은 흔하다. 용돈을 아껴서 남은 돈으로 장만하거나 손으로 손수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아름다운 전통이다.
각급 학교에서는 매학기 초엽 또는 중엽에 적어도 한번은 반드시 모든 관심 있는 부모들을 한꺼번에 초대하여 각종 교과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는 특별 행사를 치른다. 의외로 많은 학부모들이 그 열린 학교의 밤(Open School Night)에 참석한다.
자꾸만 어둑어둑해지는 교정과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복도에서 수많은 인파가 그야말로 분초를 다투며 자녀의 각과목 교실을 찾기에 여념이 없다. 자기 자녀의 걸상에 앉아서 바로 앞의 책상에 놓인 책과 공책을 뒤적거리며 과목 선생의 10분간의 짧은 특강을 들으면서 질문도 더러 하고 출석부에 싸인도 하고 나면 어느새 그만 학교종이 따르릉 울린다. 다음 과목 교실로 급히 이동하라는 신호다. 자식 덕분에 졸지에 과거의 학창 시절로 돌아가서 달콤한 향수에 잠겨볼 수 있는 것도 잠깐이다.
일종의 단체 면담이다. 자기 자식의 성적에 대하여 선생과 개별적인 얘기를 할 시간도 별로 없다. 그래도 괜찮다. 일단은 자녀의 학교생활 전반에 대하여 이런 식으로라도 한번 체계적으로 보았으면 그만이다.
선생도 학생의 부모에 대해서는 이름과 주소와 긴급 전화번호와 결혼 상태 등을 제외하고는 일절 아는 게 없다. 모든 학생들을 철저하게 공평히 다뤄야 하므로 그 외의 개인적인 사항들을 이것저것 알 것도 없다. 어떤 학생에 대하여 괜히 더 이상 알게 된다는 것은 오히려 본의 아니게 한쪽으로 삐끗하기 쉬운 부담이다.
아주 너무나 순수하고 착하고 깨끗하고 신사적이고 합리적이고 진심이고 그리고 열심이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학교라는 데는 그 애초의 순수하고도 성스러운 평등 교육의 의무 내지는 책임 자체를 의도적으로 상실하거나 비겁하게 회피할 수도 있는 궤도 이탈의 여지가 아예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그리고 선생들은 모든 학생들의 인격을 참말로 존중한다. 선생이 때리거나 체벌을 준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한다. 선생의 손찌검은 거의 어김없이 철저한 시민 보호의 의무가 있는 악착같은 검찰에 의하여 차가운 감방을 향한 형사 사건으로 비화되고, 또한 종종 피해 학부모에 의하여 거액의 민사 소송으로 증폭되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러한 통속적인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사실, 어떤 학생에게라도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성장 시기에 모든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라도 그러한 심한 폭행을 당한다는 것은 거의 치명적인 비극이다. 이곳의 선생들은 아무리 사안이 중대하고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꼭 말로 해결하지 폭력을 쓰지 않는다.
학생 개개인의 성적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여 자존심을 함부로 짓밟는 그런 무식한 행위도 아예 전무하다. 굳이 교실에 또는 교실 문에 공개적으로 방을 붙여야 할 경우에는 학생 이름 대신에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사회 보장 번호(Social Security Number)를 사용한다.
학급 전체 학생들의 수준에 의하여 좌지우지되는 상대적인 순위 성적보다는 절대적인 점수 성적에 의하여 각 과목에 대한 최종 평가를 내리는 편이다. 따라서 학생들 서로 간에 머리를 싸매며 너죽고 나만 살자라는 식의 극도로 이기적인 딱한 생존 경쟁은 거의 없다.
자기 자신과의 의연한 경쟁만을 시킴으로써, 학생들 간에 서로서로 잘 모르는 부분을 기꺼이 성심껏 도와주면서 다같이 함께 밀고 당기는 그런 아름다운 면학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조성하여, 평소에도 그로 인한 진정한 우의를 다지게 한다.
어쩌다가 어떤 과목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어쩌다가 그 공부는 좀 못하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그걸 더 배우기를 원하는 친구를 모두 자발적으로 방과 후에 직접 붙잡고 가르치게 함(Tutoring)으로써 자연스러운 평준화를 유도한다. 착하게도 동료 학생을 가르치는 학생(Tutor)은 나중에 대학 원서를 쓸 때에 선행 한 가지를 더 추가할 수도 있으니 좋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모두들 알아서 척척이다.
그리고 학교에서의 점심 급식표는 모두들 정기적으로 우편으로만 구입하게 함으로써, 그러는 와중에 가난한 집 학생들에게는 우편으로 간단한 표시만 해오면 역시 우편으로 아무런 특별 표시도 되지 않은 정상적인 급식표가 배달된다.
해당 부모와 점심 제공 업체만 그러한 고마운 도움을 받는다는 가슴 저리는 사실을 알 뿐, 해당 학생이나 담임 선생 등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다소 어려운 가정 형편이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자존심 상하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똑같은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맘껏 공부하고 성장하게끔 가히 고차원적인 인간적 배려를 한다.
여기서는 대개 교과서 한 권이 최고급으로 인쇄된 최상급 양질의 종이로 보통 오륙백 페이지나 되므로 무척이나 묵직하고 또한 보통 백불 내지는 이백불이나 하는 고가품이다. 그러므로 충분한 예산으로 움직이는 저자나 출판사나 모두들 신이 나서 똑 부러지도록 훌륭한 작품을 생산하는 상황이다.
어떠한 정부 조직이나 특정 단체가 나서서 그 내용이나 품질에 대한 일정한 종합적인 검열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철저한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바탕으로 한 완전 무한 경쟁 체제 하에서 성공적인 적자생존을 하려면, 스스로 알아서 깐깐하게 잘 만들 수 밖에 없다.
거의 모든 교과서는 각 학교에서 정부 예산으로 시시각각 대량으로 구입하는 학교의 소유물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교과서에 자연적 마모가 아닌 어떤 형태로든지의 낙서나 훼손을 할 수가 없다. 학기 초에 각 교과서의 겉장 뒤의 정해진 난에 자신의 이름과 인수 날짜를 쭈욱 강제로 쓰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자신의 선배 사용자들을 모두 한눈에 접할 수도 있고, 만약에 분실이나 손상 시에는 나중에 해당 부모에게 고약한 잔소리 편지와 함께 피해 보상 고지서가 날라 오기도 한다.
그렇게나 값비싼 교과서의 평균 수명은 다행히도 보통 10년 이상이나 된다. 그래서 가끔 내용면으로는 퀘퀘 묵은 것들도 더러 눈에 띄지만, 그때그때의 부록 등으로 말끔하게 해결하는 것이 통례다.
한편, 예전에는 책들이 너무나 무거워서 자연스럽게 학교 구내에 대량으로 설치된 열쇠가 달린 개인 사물함(Locker)에 쳐 넣고 집에는 거의 빈손으로 돌아가게들 했으나, 그런 사물함들이 일부 불량 학생들에 의하여 각종 마약이나 흉기의 임시 저장고로 사용되자 요즘에는 거의 폐쇄하는 편이다.
대신에, 아예 학기 초에 각 학생 집에다가 숙제용으로 한 벌의 교과서를 빌려주는 것 외에, 각 과목 전문 교실마다 각 책상 앞으로 한 벌의 여벌을 마련하여 그것들로 교실 수업을 하는 기발한 방법으로 교과서의 무리한 하중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하는 추세다.
그리고 여기서는, 공부를 아예 잘하는 학생들은 집안 형편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천지에 널린 각종 장학금(Scholarship)으로 원하는 좋은 대학에 비교적 수월하게 진학하여 끝까지 잘 공부할 수가 있다.
또한 집안 형편이 약간 힘들거나 대학을 못간 부모를 가진 학생들은 공부는 좀 못해도 성적이 일단 어느 수준만 되면 각급 정부나 학교에서 제공하는 재정 보조금(Financial Aid)을 받으며 약간의 일도 하며 대학에서 아무런 경제적인 걱정 없이 잘 공부할 수 있다.
지난 2004년의 미국 대선에서 석패한 민주당 부통령 후보 존 에드워즈도 그의 부모는 그 흔한 대학 교육을 못 받았기 때문에 바로 이런 경우였다. 어찌해서든지, 무지로 인한 가난의 대물림 사슬을 과감하게 인위적으로라도 끊으려는 숭고한 사회 정책적 의지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반면에, 이것도 저것도 아닌 많은 중산층(Middle Class)의 자녀들은, 그들이 정확하게 18세 이상이 되었다고 하여 재정적으로 완전한 독립 선언을 하며 하루아침에 스스로 원하여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한, 부모들의 등뼈가 정말 엄청나게 휘는 지경이다.
해당 자녀의 그 만만치 않은 모든 대학 수학 비용을 몽땅 어떻게 해서든지 자급으로 충족시켜야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개들 자택을 2차나 3차로 저당 잡혀서 급히 학자금을 마련하기도 한다.
때로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사랑하는 자녀를 집에서 완전히 내쫓는 방법으로 반강제적으로 빈곤 계층으로 만들어서는 각종 재정 보조금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게끔 하기도 한다.
결국, 미국에서의 대학 교육 기회 부여에 관한 철학 내지는 정부의 공공 정책(Public Policy)은 대단히 현명하다. 공부 잘하고 착실한 학생들은 무조건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개인이나 단체들이 무상 장학금이란 명목으로 힘껏 밀어줄 수 있게끔 세금 혜택으로 한껏 장려한다.
또한 어떤 가정에서든지 부모의 대학 교육 부재나 가난으로 인하여 자녀들이 대학 교육의 기회를 아예 놓치게 되어 그로 인한 빈곤의 반복이 대대로 연속되는 슬픈 일이 없도록 그 비참한 연결 고리를 우선 각종 정부 예산으로라도 과감하게 팍팍 끊어준다는 얘기다.
그러니, 요즘에도 돈이 없어서 또는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해서 대학 공부를 못한다는 것은 순전히 새빨간 거짓말인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늦게라도 언제든지 일단 한번 마음만 굳게 먹으면 대학 교육을 얼마든지 거의 무료로 또는 소위 껌값으로 각 동네의 초급 대학(Community College) 또는 주립 대학(State University)에서 받을 수 있는 폭넓은 기회가 천지에 널려 있다.
실제로, 머리 허연 할머니나 할아버지 면학도들을 꽤나 많은 대학 강의실에서 흔하게 볼 수가 있다. 재언하지만, 진정한 배움의 길에 나이 제한은 없다.
꼭 고등학교 졸업장(High School Diploma)이 있어야만, 이곳의 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믿겠는가? 꼭 대학원(Graduate School) 과정을 마치고 석사 학위(M.S. 또는 M.A. Degree)를 받아야만, 박사 학위(Ph.D. Degree)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경우 학사 학위(B.S. 또는 B.A. Degree)만 있어도 된다면 믿겠는가?
그렇다. 고교 졸업장이 없어도 되고 석사 학위가 없어도 된다. 사실이다. 언제든지 일단, 공부하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된다. 그 이외의 모든 제도적인 압박 장치는 얼마든지 의외로 쉽게 극복할 수가 있다. 불가능이란 거의 없다. 원하는 자에게는 다 길이 있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이곳 미국 교육 제도의 현주소다.
여기서는 대체적으로 고등학교까지의 학생들에게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그리고 계획적으로 거의 모든 면에서 한참 느슨하다고 할 수가 있다.
즉, 쓸데없이 심한 교육적 극한 상황들을 마구 설정해 놓고서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한창 지속적으로 발육할 중요하고 섬세한 시기에 처한 딱한 학생들에게 잠도 제대로 안 재우면서 닥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어디든지 대학만 들어가면, 사정은 하루아침에 180도로 뒤바뀐다. 완전히 낮과 밤이다.
이곳의 대학생들은 철저하게 자발적으로 무지막지하게 극한적으로 진짜 공부를 해야만 된다. 안 그러면 졸업도 못하고 영영 계속해서 학교에서 빌빌하거나 능력 모자라는 자신들이 스스로 알아서 중도에 모든 꿈을 포기하고 그 학교에서 영원히 그리고 쓸쓸히 사라져야만 할 판이다.
거의 모든 교수들은 학생들을 정말로 장난이 아니도록 아주 심하게 마구 밀어 붙인다. 실제로 그들은 거의 99.9% 전심전력으로 가르친다. 거의 진짜로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결강이나 휴강 한번 없이 철저하게 기계적으로 그리고 지성적으로 무섭도록 밀어 붙인다.
계속 몇 년이 걸리든지 미리 정해진 학점을 모두 성공적으로 이수해야만 누릴 수 있는 그 졸업의 순간까지 요리조리 기가 막히도록 창조적으로 그리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매몰차게 내몰고 만다.
학생들도 교수(Professor)들이 또는 강의 도우미(T.A. 즉 Teaching Assistant)들이 그토록 온갖 정성을 다해서 준비하는 중요한 강의(Lecture)를 단한번이라도 빼먹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나중에 그 강의노트(Lecture Notes)를 만회해야지만 중간고사(Midterm Exam)나 기말 고사(Final Exam)에서 겨우 낙제하지 않는다. 하여간, 이곳에는 어영부영 대학생이란 거의 없다.
그러니, 한국에서 그 어려운 고교를 무난히 마치고 이곳 미국에 또 더욱 어려운 대학 공부를 하려고 태평양도 마다 않고 건너오는 유학생이란 정말로 불쌍하다. 현실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계속하여 인생의 여유가 한치도 없을 것이므로 무지하게 불쌍하기 그지없다. 사실이다.
이곳 대학의 현실 상황이 그러하니, 원래의 계획대로 꼭 4년만에 학사모를 쓰는 꽤나 드문 경우는 고사하고 5년이나 6년이 되도 그걸 못쓰고 도중하차하는 경우가 정말로 허다하다.
그 통에 각 동네마다 거의 있는 2년제 초급 대학을 마치고 삼삼오오 4년제 대학교로 3학년 편입(Transfer)을 하는 경우가 무척이나 많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런 4년제 대학교에서는 그간 그런저런 이유로 공석이 된 수많은 빈자리들을 어찌하든 메워야만 주립 대학의 경우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수강생 머리수에 의거한 학교 예산이 배정된다. 한편, 보통 4년제에서 4년제로의 3학년 편입은 대개 원래 제도적으로 봉쇄되어있다.
아무리 고교 재학 시 공부를 좀 게을리 하여, 그 SAT라는 대학 입시 수능 시험을 망쳤다고 해도 절대로 절망할 필요가 없다. 기회는 얼마든지 자주 있기 때문이다. 일년에 단한번이 아니라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한두 달 간격으로 계속해서 일년에 대여섯 번씩 토요일마다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 시험 성적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점수만이 유효로 인정되어 장래에 선택된 대학교에 보고된다. 그래서 밑져야 본전이니까 여러 번 도전한다. 그래도 영 취향에 맞지 않으면 SAT 대신에 ACT(American College Testing)라는 시험을 역시 원할 때마다 수시로 언제든지 다른 시간표에 맞춰서 다른 토요일마다 집 근처의 지정된 빈 학교에서 볼 수도 있다.
사립(Private) 또는 주립(State) 4년제 대학교(University)에 들어가기 위하여 따로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는 일은 없다. 평소의 학교 성적을 바탕으로 고교 재학 4년 중 첫 해와 마지막 해를 제외한 중간의 2년 성적과 가장 유리한 수능 시험 성적만을 입학 신청서와 함께 제출하면 된다.
같은 과목이라도 대학 교과서로 배우는 좀 높은 수준의 AP(Advanced Placement)라는 것을 들었으면 평점도 1점씩 가산해 준다. 방과 후의 여가 시간 활용을 무료 자원 봉사나 학교 과외 활동 내지는 파트타임(Part Time) 직업 내역 중심으로 평가한다. 한마디로, 지원자의 성적만이 아닌 그 외의 모든 인간적인 면을 다 한꺼번에 보겠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논리 전개 방식 상으로 아주 답답한 귀납법이 아닌 화끈한 연역법만을 바탕으로 한 간단한 한 페이지짜리 수필 내지는 논문(Essay)이 대학교 입학의 당락에 있어서 무척이나 중차대한 역할을 한다.
오자나 탈자가 전무해야 됨은 물론이다. 그러기에, 미리 집에서 각자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작성한 후에 관심 있는 부모나 선생들이나 친구들의 검증과 교정도 여러번 확실하게 다 마친 다음에 대학 입학 원서(College Admission Application)에 첨부하면 된다.
중복 지원에 관한 아무런 특별한 제한이 없으므로 본인이 원하는 여기저기 대학교들의 희망 학과들에 아니면 일단 전공 없이, 대체적으로 대학 수업 시작 시기인 매년 9월보다도 10개월 정도나 한참 앞인 전해 11월 말까지, 그 입학 원서들을 잔뜩 제출하고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몇 달을 기다린다. 하루아침에 당락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므로 다소 상당한 인내심을 요구한다.
대개의 경우,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중복으로 입학 허가서가 오기 때문에, 끝까지 인내심으로 기다렸다가 거의 마지막 순간에 최종 선택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리하여 각 대학에서는 예를 들어, 대강 5천명에게 입학 허가서를 발송했으나 과연 실질적으로 몇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진짜로 입학 계약금을 내면서 입학 신청을 해올 것인지, 도무지 오리무중인 상태다.
과거의 실제 기록에 견주어 우선 그냥 대강 예측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맹점마저도 사실은 각 대학의 자발적인 면학 분위기 향상을 위한 노력 경주의 중요한 구실을 제공한다. 좋은 대학 일수록 합격된 신입을 허가 받은 학생들의 최종 선택 비율이 높은 것은 당연지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저러해서 정작 원하는 대학교에서는 끝내 입학 허가서가 오지 않더라도, 낙방생들은 그리 크게 상심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몽땅 다 잊고 마치 재수하는 차분한 심정으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일단, 동네의 2년제 초급 대학에 그냥 이름만 걸면 합격되므로 거기서 처음부터 다시 깨끗하게 새 출발을 하는 것이다. 어떤 4년제 대학교로 가더라도 어차피 똑같이 거쳐야만 되는 고교 과정의 반복인 교양 과목(General Education)들을 차근차근하게 비교적 좋은 성적으로 이수만 하면 된다. 소중한 인생 역전의 기회를 힘차게 걸머쥘 수 있다.
거기서의 오직 1학년 성적만을 바탕으로, 우선 어느 4년제 대학교이든지 간에, 추후에 3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는 황금과도 같은 인생의 재도전 기회가 누구에게든지 활짝 열려져 있다.
그러니 미국에서는 어느 대학에 떨어졌다고 해서 나 홀로 외롭게 싱싱한 인생을 팍팍 썩여가면서 재수나 삼수나 사수를 할 필요가 없다. 아예 그런 불행한 반복 개념조차도 전무하다.
아무리 순간적인 실망이 크더라도 한밤중에 변변한 낙하산도 없이 끝도 보이지 않는 아래층으로 무작정 달랑 뛰어내리며 이 좋은 세상을 무심하게 도중에 하직할 아무런 이유나 필요도 없다.
그까짓 한낱 공부 때문에 어린 학생들이 할 수 없이 그러한 무시무시한 되돌아올 수도 없는 길을 택해야만 체면이 선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완전 포기 개념이 이 사회에는 아예 전혀 없다. 원천적으로 전무하다.
공부를 잘못한 죄로 또는 어쩌다가 실수로 시험에 낙방하여 자살했다는 얘기는 이 사회에서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나중에라도 좋은 기회는 얼마든지 다시금 주어지고 공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생 방정식의 전부가 아니고 오직 일부이기 때문이다.
문득,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British Prime Minister)이 바로 조금 전에 영국 노동당(Labour Party)의 연례 회의(Annual Conference) 석상에서 무척이나 열정적으로 행한 긴 즉흥 연설 도중에 아주 심각하게 또박또박 토해낸 명언 하나가 내 뇌리를 강렬하게 때리고 있다.
"A great injustice I know is that education is only for the wealthy and privileged. (교육이 단지 부유층과 특권층만을 위한 것이라면 제가 알기로는 엄청나게 부당한 조치입니다.)"
스티브 김, 유코피아 연재칼럼 "미국은 있다" 저자